끌로드 샤브롤 - <마담 보바리> 집단리뷰 향유/Movie 2011.02.28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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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이 영화화될 때는 각색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된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는 클로드 샤브롤, 장 르느와르,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감독에 의해 각각 다른 유형의 각색을 통해 영화화 되었다. 샤브롤의 동명영화는 흔히 말하는 자의적 각색으로 원전의 순서를 존중하면서 장면별로 그 내용을 영화의 시퀀스로 오려붙인(데쿠파주) 방식을 상용했다. 한편 르느와르는 원전의 주요 장면위에 시나리오를 다시 쓰는 자유로운 각색을, 올리베이라의 <Val Abraham(아브라함 계곡)>은 원전에서 가장 기본적인 서사 구조(주제, 인물, 상황 등)만을 취해 거의 새로운 각본으로 다시 쓰는 방식을 택했다. 이 중 샤브롤 감독의 영화를 원작소설과 함께 읽는 시간을 가졌다.*


A: 일단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가 참 좋았다. 그리고 카메라가 전반적으로 물흐르듯이 찍는다. 샷-리버스의 사용도 매우 적다. 거울 속의 엠마를 많이 잡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무도회 장면에서 카메라가 드레스 치마를 따라 들어가다가 무도회장 안으로 올라가며 들어가는 건 참 신기했다. 어떻게 찍었을지 궁금했다.

B: 2000년대 이후 여자가 자기 욕망에 충실한 영화를 보면, 이 영화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 같다. <디아워스>에서 줄리앤 무어가 권태 때문에 자살하고, <아이 엠 러브>에서도 아들의 친구와 사랑을 나누고 거울에 자신을 비추는 장면이 나온다.

C: 소설을 보면서 느꼈던 것들과 필요한 대사들을 잘 추려내서 영화를 잘 만들었다. 엠마가 결혼하고 나서 풀숲에서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며 "왜 결혼했지?"라고 읊조리는 장면이나, 불륜도 6개월이 지나니 또 지루하고 권태로워진다는 장면들을 잘 살렸다. 책에선 좀 더 자세한데, "내가 왜 남편을 사랑하려고 하지 않았을까?"라고 마음을 돌리려다가 수술이 잘못된 이후로는 완전 독백이 바뀐다. 엠마의 독백, 시선을 따라 관객도 남편이 멍청해 보일 지경이다.

D: 엠마의 욕망은 중세에서 자본주의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결국 3천프랑 짜리 사랑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플로베르가 설마 이 얘기를 하려고 글을 쓴 건 아닌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원작을 잘 살리지 못한 것 같다.

A: 아쉬운 점들이 분명 있다. 소설에서 다루었던 오메(약사)와 신부의 캐릭터가 너무 약화되었다. 과학주의자 오메와 종교주의자 신부가 만들어내는 알레고리가 있는데, 감독은 엠마의 감정선을 중심으로 찍은 것 같다. 게다가 엠마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원작에 비해 좀 기울어졌다. 환상을 쫓고 사치를 하다 죽어버린 캐릭터. 그래서 뭔가 교훈적인 느낌으로 간다. 편견일 수 있겠지만, 샤브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비난하는 영화작업을 계속 하는 감독인데, 그런 입장에서 훈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E: 감독이 원래 그런 작업을 했다면 각색이 잘못된 것 아닌가? 원작은 잘먹고 잘 사는 소시민들 사이에 그렇지 않은 직선적 인물인 엠마를 쑥 집어넣어서 상대적으로 그들의 삶이 얼마나 삶에 매몰된 비루한 허상인지를 드러낸다. 그런데 주변 인물들이 다 죽어버리고, 엠마만 남으니 그 의미가 오히려 퇴색된 것으로 보인다. 감독의 두번째 잘못은 샤를 역에 너무 호감형 배우을 쓴 것이다. 샤를은 그냥 무기력한 사람이다. 엄마, 첫부인, 엠마에게 계속 종속되어 산다. 샤를이 엠마를 사랑한 건 맞지만, 샤를은 엠마가 권태에 빠지는 이유도 모른다. 심지어 엠마가 비소를 먹었을 때도 자기랑 사는 게 행복한 줄 알았었다고 하지 않는가.

F: 텍스트에서는 감정을 끝까지 끌고가는 면이 있는데, 영화에서는 단선적이고, 너무 얌전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감각의 제국>과 비교되었다. 엠마의 욕망은 그저 욕망의 치닫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영화에서 너무 교훈적으로 끝나서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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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샤를 보바리 - 무기력했던 샤를은 엠마의 죽음을 겪고 나서 드디어 주체성을 확보한다. 간섭하는 엄마에게도 ‘나가라’고 하고, 엠마의 죽음이 하나님 뜻이라고 하는 신부에게도 ‘당신의 하나님을 증오한다’고 일갈한다. 그런 의미에서 심지어 이 작품이 샤를의 영혼해방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한다.

 

D: 샤를은 무조건적 사랑의 표상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가부장적 역할 분담과 온화한 가장의 이미지로 단편적으로 그려진다. 중세에서 합리주의가 도래하고 자본주의로 건너가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부딪히는 그런 가치관들과 상관없이 오직 ‘엠마’니까 좋아한다. 그리고 엠마는 환상에 머물러있다. 주체들 간의 중간의 영역에서 만나는 사랑, 그야말로 세상의 사랑의 양태들 중 하나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자보다는 후자(엠마)가 사랑의 이미지에 종속되기 쉽고, 결국 자본주의 매커니즘으로 귀결되는 게 요즘 시대랑 같다.

 

G: 엠마는 나쁜 캐릭터로 나오고, 샤를은 굉장히 무심하지만 순수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샤를은 이 비극의 책임이 없는가? 샤를은 자기의 무심한 습성을 고치려하지 않았다는 이 비극의 책임이 있다. 엠마에게만 책임을 지울 수 없다.
    게다가 엠마보다 좀 약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샤를도 자기의 욕망을 따라갔다. ‘엠마 같은 여자가 내 아내라서 난 더 괜찮은 남자인 것 같다’고 하면서, 파티장에서도 극장에서도 엠마의 남편이라는 것에 대해 뿌듯해하는 것이 보인다. 다리 수술 사건도 사람들로부터 촉망받는 대상이 되고 싶은 마음의 발로였다. 감독은 엠마에 집중했지만, 샤를 또한 분명 욕망을 따르는 인물이고, 이 사태에 책임이 있다.

 

H: 이 작품은 ‘여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모든 남자의 두려움이 반영된 듯 하다. 모든 남자들은 자기 여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아무리 돌덩이라도 외과공부를 한 사람인데 저 정도 센스가 없다는 것은 짐승이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인데, 그렇게 눈치가 없을 수가 있나. 샤를은 자기가 엠마를 채워주지 못하는 것을 안다. 그래서 엠마가 죽고나서 그녀의 불륜 사실을 알고 나서도 로돌프에게 “난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엠마에게 필요하지만 자기가 못해준 것을 그 남자가 해주었으니까 용서하는거다.

 

D: 샤를의 지고지순함이 오히려 그 사람의 한계인 것 같다. 사랑이란 존재와 존재 사이의 것인데, 샤를의 태도는 숭고함(?)이 있을지언정,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관계를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느끼는 결핍 같은 걸 충족시키지 못하지 때문에, 샤를은 로돌프나 레옹에게 ‘넌 나쁜 놈’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사람들이 샤를의 한계를 충족해줬기 때문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샤를에게 공감이 가면서도 느껴지는, ‘상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공포’가 분명히 있다.

 

A: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보면 바람피는 여자가 있다. 그 남편은 애들을 돌보면서 “내가 뭘 더해야 해”라면서 최선을 다하지만, 여자는 바람을 피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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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보바리 부인 – 엠마는 수녀원에서 읽었던 3류 연애소설에 경도되어 화려한 사교계와 사랑에 매혹되었다. 샤를은 그저 자기를 농장에서 읍내로 데려갈 수 있는 고 정도의 매혹만 가질 뿐이었다. 권태를 느끼는 것은 샤를의 잘못도 있지만, 엠마는 권태를 멈출 수도 없다. 자기가 생각하는 그 이상을 향해 갈 수 밖에 없는 열정에 대한 순수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순수함'은 도덕이 남이 강요한 법칙이고, 윤리는 내가 나에게 세운 법칙인데, 그 윤리적 태도에 대한 충실함을 뜻한다.) 사회화가 된 보통사람들은 3류 연애소설과 현실의 선을 그어놓고 읽을거리로만 취급하지만 엠마는 돌진만 한다. 사회화는 양날의 검인데, 지나치게 사회에 적응을 잘한 소시민의 모습과 엠마가 대척점에 섰을 때, 엠마에게는 소시민이 가지지 못하는 리얼리티라는 옹호지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A: 윤리적 태도의 측면에서는 순수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철이 안 든거고, 사회화가 되지 않은 건 유아기적 태도로도 볼 수 있다. 엠마의 열정이라는 형식과 욕망이라는 내용을 분리해서 보면, 그 내용은 자기 욕망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입된 욕망이다. 내용을 배제한 채 윤리적이라는 형식만 가지고 그걸 옹호할 수 있는가?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히틀러가 ‘자기 표상이 세계이다’라고 했는데, 형식이 훌륭해도 내용에 문제가 있을 때 이렇게 위험해질 수도 있다. 엠마의 상상적인 것은 나르시시즘에 빠질 위험에 처할 수 있고, 그 열정은 타자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힘을 가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자가 배제되어 부정적이 되기도 한다.

    사교계를 향한 욕망과 허영이 사치과 낭비를 낳고 결국 경제적 파산과 파멸을 불러온 것으로 볼 수 있다.

 

E: 물론 종속된 욕망 자체는 긍정할 수 없다. 하지만, 사치나 파산이 엠마의 파멸의 직접 원인은 아니다. 엠마가 생각하기에 자기네 사랑은 그 무엇보다 우선순위라서 레옹에게 당당하게 횡령을 요구하고, 로돌프도 찾아가지만, 그게 모두 허상으로 드러났을 때,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즉, 엠마가 죽은 건 파산이 원인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이라고 믿고 있던 것이 날아가 버려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거다. 로돌프가 '난 너를 사랑한다. 며칠 후에 돈을 마려해주겠다'라고 했다면, 파산을 할 지언정 자살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더 이상 권태와 허상의 미끄러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조차 든다.

 

H: 엠마의 상황은 질식할 상황이다. 신부와 상담하려는데 도무지 말이 통하지도 않고, 남편도 벽이다. 사교계가 아니라 사랑에 빠져서 옷사입고 그러는 거 같다. 자기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그 어떤 달콤한 것을 만나니, 다른 생각은 다 사라지고 그 욕망에만 올인해서 낭비고 뭐고 상관하지 않는다. 제비족이 왜 생겼겠나? 어떻게 밥만 먹고 사나?
   실제로 그런 여자들이 많다. 그리고 현대의 여자들이 이러한 욕망을 배출할 수 있는 비교적 긍정적인 통로는 아이돌인 것 같다. 비 콘서트에 가보았는데 다 아줌마들이다. 콘서트가 끝나고 어느 할머니는 주저앉아서 울더라. 이제 무슨 낙으로 사냐고… 현실의 사람들은 엠마만큼 순수하진 않으니까, 애초에 남편에게서 채워지지 않을 것으로 포기하고 다른 데서 찾는거다.
   엠마 같은 여자들은 글을 쓰거나, 예술을 해야 된다. 로돌프 같은 꾼이 얼마나 귀신 같이 알아내는가. 딱 보고 ‘아, 이 여자, 지금 권태다!’

 

B: 그런데 엠마는 시종일관 집안일은 거들떠보지 않다가 왜 갑자기 파산에 집중하는가?

 

E: 신경안쓰고 끌어 쓸 대로 쓰다가 이제 목에 찬거다. 뻔뻔할 수 있는 한도가 거기까지였을지도. 물론, 그 지점에서도 그냥 남편에게 얘기할까? 그래도 샤를르는 이해해 줄거라고 생각하지만.

 

H: 뻔뻔함이 미진하다. 남북전쟁 시기랑 비슷한 시대배경으로 보이는데, 스칼렛하고 비교했을 때 너무 부족하다. 스칼렛이라면 기요맹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다. 이런 면에서 엠마는 자기 감정에 도취만 되었지, 강인한 여성상은 아니다.

 

B: 엠마가 자기가 주체로 한 건 하나도 없다. 굉장히 수동적이다.

 

E: 맞다. 엠마는 스칼렛과 다르다. 레옹과의 관계도, 로돌프와의 관계도 수동적이었다. 게다가 그들과 만나게 되는 계기인 승마를 추천하고 극장에서 레옹을 데리고 오고 루앙에 남아서 공연을 더 보고 오라고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건 오히려 샤를이다. 샤를이 엠마의 불륜의 중개자 역할을 한다.

 

H: 샤를이 알고 그런거라니깐. 자기가 채워줄 수 없으니까. (웃음)

 

E: 장님거지의 노래는 욕망에 대한 엠마의 열정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장치같다. 육체는 생명을 잃고 거의 죽음의 지경에 이르렀지만, 장님 거지의 노래가 들렸을 때, 엠마는 벌떡 일어났다가 죽어버린다. 죽는 순간에도 소멸되지 않는 욕망, 그런 욕망을 가지고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하는데 어떻게 살겠는가, 죽어야지.

 

G: 거지는 <란>, <리어왕>의 광대와 같이 진리를 말해주는 역할로 보인다. 장님은 엠마에게 ‘너는 그렇게 사랑을 쫓아 다니지만, 네가 귀족의 삶을 쫓고 있지만, 그건 내가 너한테 5프랑을 구걸해서 잠시 내 현실을 잊는 것과 같다. 너도 잠시 그 욕망에 휩싸에 현실을 잊어본들, 결국 네 현실은 나와 같다.’는 의미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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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박지희(2005), "활자 매체에서 영상 매체로의 다시쓰기: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와 두 영화를 중심으로", 『한국 프랑스학 논집』 제51집, pp.379-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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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따르면, 샤브롤의 <마담 보바리>는 플로베르 원작의 문학적 기법들을 관습적인 영화 코드로 전환한 반면, 올리베이라의 <Val Abraham(아브라함 계곡)>은 기의적으로는 원전과 모호한 관계만 가지지만, 서사를 구성하고 배열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오히려 플로베르의 기법을 잘 살렸다고 한다.


2월 [바벨의 북클럽] 귀스타브 플로베르 - 마담 보바리
토요영화모임 [주말의 명화] 끌로드 샤브롤 - 마담 보바리

2011. 2. 19 신도림 [에디공;방]에서 나눈 수다.(정리: 이소선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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