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 - <비터 문> 집단리뷰 향유/Movie 2011.01.22 01:16

1/15(토) 주말의 명화 모임 <비터 문> 수다 정리



 


 

영화 <비터 문> 이후, '비터 문'은 신혼여행을 뜻하는 허니문과 반대 의미인 이별여행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우리는 이별 앞에 뜨거웠던 사랑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묻는다. 나는 너를 사랑한 것일까? 아니면 너를 사랑한다는 나의 마음을 사랑하고 있던 걸까? 우리는 최초의 뜨거웠던 사랑을 진실이라 믿고 싶다. 진실했지만 알 수 없는 균열이 생기면서 관계가 깨졌다고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고, 나의 판타지 속 나르시시즘적 쾌락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 같다.


M: 오스카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 굉장히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96번 버스 노선을 따라서 미미를 찾아다니는 장면, 서로 만나서 사랑하는 장면.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욕망이 도를 넘고 나서 서로 통제를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자는 남자를 원하지만 남자는 권태를 느끼면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처음의 그 순수한 사랑이 어디로 사라졌나? 이게 뭔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가?


Jue: 성적인 탐닉에 빠지며 과장되어서 그렇지, 남녀관계가 다 그렇지 않나. 처음에는 여자가 관심 없는데 남자가 따라다니다가, 나중에는 여자는 편안한 관계로 잘 지내고 싶은데, 남자는 싫증을 느끼는 것. 일반적인 것 아닌가? 나이젤도 피오나에 대해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SS: 전형적인 남녀의 로맨스를 압축해서 보여줬는데, 남녀 심리의 시간차가 아니라, 둘이 하나가 되려고 하다보니까, 비터(bitter)하게 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Jue: 오스카가 미미를 사랑했는가? 아닌 것 같다. 미미와 오스카가 로맨틱하게 처음 만나는 버스 장면에서 마치 샴푸나 향수 광고처럼 ‘Ulla' 광고가 붙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성매매 광고였다는 점에서 시작부터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Dna: 사랑은 한 것 같다. 관계 유지를 위해 새로운 걸 하였고, 그래서 더 사랑했는데, 결국 탐닉과 파탄에 빠져버렸다. 어디에서부터 말랑말랑한 사랑에 균열이 찾아오는지는 모르겠다.


M: 작용-반작용이다. 여자가 원하는 부분에 대해 남자가 반응을 했고, 서로의 기쁨을 위해서 해 왔던 행동이었다. 사랑을 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중에는 집착과 병적인 사랑으로 변해갔다.


Won: 나이젤과 피오나가 배에서 처음 미미를 만나는 장면에서 서로의 행선지를 묻는다. 나이젤과 피오나는 어디 어디를 거쳐서 뭄바이를 간다고 한다. 미미는 특정한 지명을 말하지 않은 채, ‘멀리, 더 멀리’라고 답한다. 관계 유지를 위해서는 늘 자극이 필요한 건데,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관계 개선이라는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사용됐던 그 자극이 오히려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지점을 보여준다. 이것은 일종의 페티시즘인데, 오스카와 미미의 경우 결국 사도 마조히즘적 관계로 치달으며 관계는 파탄난다. 7년차 부부인 나이젤과 피오나는 여행을 통해 관계를 개선하려하지만, 목적에 다다르지 못한 채, 늘 ‘멀리 더 멀리’ 나아가다가 동반자살이라는 파국에 치달은 오스카와 미미의 관계 앞에,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GG: 이야기하는 사람이 오스카였는데, 모든 일이 오스카의 관점에서 진행돼서, 미미의 감정은 배제된 채, 오스카의 판타지만이 있었다. 오스카는 작가인데, 솔직히 미미라는 여자에게 빠졌다기보다는, 상황이 너무 멋졌던 것 같다. 빨간색 원피스에 하얀 피부에 금발의 여자와, 버스 안에서의 여러 분위기가 미미와 사랑에 빠지게 하는 지점. 미미의 육체적 성숙함과 아이 같은 외양이 너무 절묘하지 않았나?


Dna: 베이글녀(베이비 페이스에 글래머녀) (웃음)


Jue: 남자가 여자를 사랑했다기보다는 자신을 너무 사랑한 게 아닌가. 자신의 원하는 바에 아주 충실한 대상을.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한 게 아닐까.


S: <북회귀선>에 헨리 밀러가 좋아하는 여자 이름이 미미였던 것 같다. 오스카가 헨리 밀러를 동경해서 파리에 온다. 미미라는 이름을 듣고 오스카가 놀란다. 여자 미미는 철저하게 대상이다. 오스카는 헨리 밀러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복회귀선>은 아무런 소설도 쓰지 못하고 방탕기를 보내는 내용인데, 오스카는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가서, 이야기 속에서 사랑을 하는 거다. 자기 세상을 사랑하는 거다. 나이젤의 경우 오스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라자드가 얘기해주면 들은 사람이 사랑하게 되듯이, 미미에게 사랑에 빠진다. 광기를 뜻하는 단어가 두 가지가 있는데, ‘insane’은 내재적으로 미치는 것이고 ‘lunatic’은 영향을 받아서 미치는 것이다. 오스카는 헨리 밀러의 이야기에, 나이젤은 오스카의 마력에 영향을 받아서 미미에게 빠진다.


우리는 오스카와 미미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얻기 힘들었다. 사랑을 했는데 어떤 이유로 인해 무너졌다고 봐야하는지, 아니면 시작부터가 판타지에 불과했던 건지. 하지만 사랑의 본질과 판타지는 논리적으로 구분이 가능할 뿐, 실제의 사랑에는 늘 함께 하기 때문에, 순수하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순수하게 판타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에서는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의 이야기에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것이 실재인지 판타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대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오스카, 나이젤, 심지어 피오나까지)이 ‘미미’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에게 어떤 치명적 매력이 있던 것일까?


S: 미미는 살아있는 사람인데, 다들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본다. 헨리 밀러도 많은 여자를 만나지만, 유독 미미에게 자기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게 있다. 미미는 일종의 백치인데, 백치는 늘 치유의 존재이다. <동막골>이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와 같이 형이상학적 고민이나, 상처가 있는 사람은 백치에게 치유를 받는다.


Won: 남자가 백치에 빠지는 건 모든 것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오스카와 나이젤이 미미를 사랑하게 된 것은 상상적인 그림을 잘 그릴 수 있기 때문인 게 아닐까.


S: 백치는 말을 안 하고 텅 비어 있어서, 자신의 것을 반영할 수 있어서 매력있는 것이 아니다. 백치는 꾸미지 않는 존재다. 격식이나 도덕이나 종교에 억압을 받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의 욕망을 쉽게 말하는 자이다. 사회화된 사람이나 자신에게 억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치유를 받는 거다. 일종의 동물화된 인간이다.


Won: 미미는 누구에게나 맞춰갈 수 있는 사람이다. 오스카나 피오나의 요구를 미미는 다 맞춰간다.


S: 미미는 타인에게 맞추는 사람이 아니다.


Won: 유연한 사람이다. 자신의 호불호가 분명해서,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S: 미미는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이다. 거부할 것을 확실히 거부한다. 나이젤을 거부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가령 롤리타의 경우도 자기 주장이 확실한 여자다. 싫은 건 절대 안 한다. 외부에서 자기를 규정하는 가치나 규범을 믿는 게 아니고, 자신의 욕망과 본능에 충실한 동물화된 존재다. 자기 자신에 솔직한 사람이다.


Jue: 여기서 미미는 그런 타입은 아닌 것 같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는 일은 없다. 나이젤을 거부한 것도 싫어서가 아니라 오스카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미가 자기의 욕망 때문에 본능적으로 행동한 건 거의 없는 것 같다. 오스카가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는 판타지적 존재다. 판타지적 존재라는 게 솔직히 너 싫다고 나가라고 하는데 매달리는 여자는 없다. 남자들이 원하는 타입의 여자다. 얼굴도 괜찮은데 몸매는 죽여줘요, 말은 별로 없어요. 시키는 대로 다 해요. 그래서 저건 실존이 아니다.


Won: 미미의 욕망을 그렸다면, 형식 자체가 오스카를 통해 얘기되면 안 될 것 같다. 오스카의 얘기가 중요하다. 미미의 동물화된 욕망을 얘기하려면 오스카의 이야기 속의 미미라는 형식은 어울리지 않는다.


S: 이야기 구성 자체는 그런 것이 맞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 미미의 캐릭터가 백치였다는 것이다.


GG: 모두 각자의 미미를 투영하고 있다. (웃음)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왜 이런 망망대해 위의 배를 설정했을까? 인도 남자와 그의 딸이 ‘해피 뉴 이어’라고 말한 것과 나이젤과 피오나의 포옹은 어떤 의미일까? 


Dna: 오프닝에서 하염없는 망망대해가 나온다. 치명적으로 꽉 옴짝달싹 못하게, 도망갈 수 없는,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S: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 나갈 수 있는 건 오직 이야기와 상상 밖에 없는 구조다.


Won: 오스카가 흔들리는 배에서 타이타닉 얘기를 하는데, 타이타닉은 영국의 위엄을 뽐내는 상징이었지만 좌초된 배다. 영화에 등장하는 영국인 부부 피오나와 나이젤의 좌초된 관계를 말해주는 메타포가 아닐까.


Dna: 마지막에 인도 여자아이가 ‘해피 뉴 이어’라고 말하는 장면은 어떻게 봐야하나. 그들의 마지막 포옹은? 


M: 껍질을 벗고 나서 처음으로 진짜 포옹을 한 거 아닐까?


S: 일상적이고 소시민적인 층위에서 다른 세계를 맛본 거다. 이야기를 한 번 경험했기 때문에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슬픈 포옹이다. 예전의 층위의 사랑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 거고, 종국에는 파멸밖에 없는 욕망에 끌리고 그것을 따라갈 수밖에.


SS: 해피 엔딩으로 봤다. 인도 여자아이의 ‘해피 뉴 이어’라는 말은 관계의 새로운 해를 말해주는 게 아닐까. 그리고 나이젤과 피오나의 표정도 어둡지 않았다.


M: 서로 모든 것을 개방하고 알게 된 후에도 사랑은 가능한가?

 

천사처럼 예쁜 인도 여자아이의 '해피 뉴 이어'라는 인사는 일종의 구원과 같았다. 물론 새로운 시작 자체는 구원을 담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기회에 불과하다. 그 기회를 정말 구원으로 연결시키는 것, 다시 말해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을 이뤄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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