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톺아보기 6] 고통을 통해 성숙한다는 조언에 대해 해석/View 2011.03.28 23:27

“신약 성서의 예를 드는 것이 좋겠다. 예수는 대단히 자주 병자들을 치료하지만, 그들에게 고통과 화해하라고 권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병이 병자들의 풍부한 삶을 박탁하고 다른 사람과의 공동체적 관계를 차단하므로 악하다고 보는 듯하다. (중략) 그는 고통이 저주임을 올바르게 인식한다. 고통에 대항한 예수의 투쟁은 민중의 내면을 치료하는 과정일 뿐 아니라 인류의 구원에 필수적인 부분으로 그려진다. 예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죽음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물론 그는 자신이 실패해야만 자신의 사명이 성공적으로 완수될 것임을 애매하게나마 믿고 있지만 말이다. 섬세하게 묘사되는 겟세마네 장면에서 예수는 그가 겪어야만 하는 고통을 예상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아버지에게 고통을 면하게 해 달라고 절박하게 부탁한다. 그때의 그는 금방 부활할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던질 각오를 하면서도, 그처럼 절대적으로 불쾌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를 경건하게 기도하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 『우리 시대의 비극론』, 83-84쪽.



램브란트, 십자가에서 내려오심, 1634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쉽사리 ‘성숙’을 위한 한 과정으로 그것을 다루려 한다. 이것은 고통을 경험한 자들의 공통된 조언으로서 제시되는데, 대체로 하찮은 이유 때문에 발생하는 우리의 고통을 낭만화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아주 가끔 직면하게 되는 공적인 고통의 문제를 숭고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고통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기 때문에 무조건 피해야할 것은 아니다. 많은 성숙/성공한 자들은 ‘고통’의 문제를 잘 처리/극복한 경험담을 가진다. 

하지만 예수에게 있어 고통은 저주이다. 따라서 그는 저주 아래 신음하는 그의 백성을 고친다. 이것은 예수 본인의 고통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부활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 혹은 수단으로서 고통을 다루지 않는다. 마가복음을 통해 확인하듯이, 그의 마지막 말은 우리의 일반적인 기억- ‘다 이루었다’-과 달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처절한 울부짖음이다. 우리의 선택적 기억은 우리가 사도신경을 생략적으로 고백(사도신경 영역본은 “wsa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로 나와 있다.) 하는 것과 더불어, 고통의 문제를 철저하게 취급하지 않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

고통의 문제를 취급하는 우리는 ‘다 이루었다’는 성공을 기대하지, 지옥으로 내려간 예수를 고백하지 않는다.  이글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한 도구로 최악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오히려 그것을 극복할 희망이 생긴다. 최악을 인간 상황에 대한 최종적 표현으로 받아들일 때만 그것은 최종적 표현이기를 멈추게 된다.”

기독교는 사람들을 고통으로 부터 구원하려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부활한 예수를 통해 샬롬의 나라를 체험하고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그 나라는 단순히 죽어서 가는 저 나라는 아니다. 우리의 부활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시고 묻히시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포함한다. 여기서 우리는 고통에 관한 표준적인 교훈을 넘어서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by 변칙녀

 

  • ㅇ.ㅇ | 2011.12.01 20:06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고통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대화하기 어려운 주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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