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 수방사 - 수컷을 위한 방은 없다? 향유/Media 2015.11.29 01:37



‘수방사’. 처음 이 단어를 들었을 때 머릿속에 떠올린 뜻은 서울의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수도방위사령부’였다. 하지만 XTM에서 ‘수컷의 방을 사수하라’(줄여서 ‘수방사’)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수방사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수방사는 수컷인 남편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빼앗긴(?) 자신만의 공간을 사수하기 위해 아내 몰래 집을 개조하는 과정을 뜻한다. 수도방위사령부가 서울을 지킨다면, 수방사는 남편의 공간을 지킨다는 설정인 것이다. 그렇게 4회에 걸쳐 방영된 파일럿 프로그램에서 2톤의 바닷물을 채운 낚시터, 40포대의 자갈이 깔린 캠핑장, 최첨단 컴퓨터와 방음 처리된 피시방, 그리고 타격 연습이 가능한 야구장이 들어섰다.


수방사는 방송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첫회부터 물의를 일으킬 우려”가 다분한 프로그램이었다. 남편이 가족과 상의 없이 집을 개조하면서 오로지 수컷인 자신의 방을 사수한다며 인테리어를 바꾼다는 발상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더 쾌적하고 유용하게 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집을 개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남편이 스스로를 약자로 자처하며 아내를 적으로 삼고 전쟁을 하는 것처럼 진행하는 태도 또한 아무리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매우 고약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수방사는 물의를 일으키는 대신 남성 시청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파일럿 방송 3회 만에 정규 편성을 확정 지었다. 주 타깃 연령층인 25세에서 44세 남성 시청률은 1회 방송 만에 10배로 뛰었다. 남성 시청자들은 열렬히 환호했고, 프로그램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집에서 설 곳이 없다’는 수컷들의 의뢰 글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다.


남자는 억압받고 힘없는 존재?


그렇다면 실제로 가족 안에서 남성들은 이 프로그램이 반복하여 주장하듯이 ‘억압받고 힘없는 남자들’, ‘아내의 눈칫밥을 먹는 불쌍한 남자들’인 걸까? 방송에 출연한 의뢰인들은 실제로 그렇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공간이 하나도 없다고 불평하며 한목소리로 안방, 아이 방, 옷 방은 있어도 내 방은 없다고 한탄한다. 심지어 그들은 TV가 놓인 거실도 아내를 위한 공간이라는 식의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있다.


수컷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과장됐지만 거짓은 아닐지 모른다. 아무리 중산층이라도 부동산에 거품이 가득 낀 대한민국 현실에서 자신의 취미 공간을 확보할 정도로 넓은 집을 갖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고된 노동을 끝마치고 늦은 시간에 귀가하더라도 혹여 아내와 아이가 깰까 봐 노심초사하며 이어폰을 끼고 축구 경기를 보거나 게임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러한 박탈감과 피해의식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우월한 지위를 드러내 준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암방사(암컷의 방을 사수하라)를 찍겠다고 나설 수 없기 때문이다. 아내에게는 집이 취미 구현의 공간일 수 없다. 집은 그저 미지급 노동의 현장일 뿐이다. 3회에서 피시방을 만들기 위해 철거한 아내의 재봉틀은 취미 도구가 아니라 가족의 옷을 수선할 살림 도구였다. 그리고 거실에 인조잔디가 깔리고 캠핑장으로 변모한 집을 마주한 맞벌이 아내가 가장 걱정한 일이 청소였다는 점도 남녀 간의 비대칭적 현실을 드러낸다. 남성에게는 노동시간과 휴식시간이 구분되어 있지만, 여성에게는 그러한 시간의 구분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 단지 지급된 노동과 미지급된 노동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이는 통계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지난 9월에 발간된 ‘통계로 본 서울시민 생활시간 변화’에 따르면 20세 이상 성인 여성은 하루에 3시간 17분을, 남성은 43분을 가사노동을 위해 사용한다. 물론 임금 노동 시간은 남성이 4시간 27분, 여성이 2시간 39분이어서 남자가 더 오래 일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일과 가사 등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합한 시간은 여성이 8시간 3분, 남성이 7시간 51분으로 여성이 남성을 앞섰다.


수컷으로 변신한 남성들


하지만 이러한 객관적인 지표와 상관없이 남성들은 그들의 지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계속 주장해 왔다. 2009년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인 ‘남성인권보장위원회’를 떠올려 보자. 흔히 운동권 시위 문화로 상징되는 빨간 머리띠와 조끼, 북을 들고나온 남성 코미디언들은 “영화표는 내가 샀다, 팝콘값은 네가 내라!”, “네 생일엔 명품 가방! 내 생일엔 십자수냐!”라고 구호를 외치며 연애에서 남성들이 당하는 차별을 풍자적으로 고발했다. 그리고 이들은 항상 마지막 멘트로 “여자들이 밥을 사는 그 날까지, 남자들이여, 일어나라!”라고 선동했다. 그리고 2015년, ‘남자의 날을 세우겠다’는 XTM 채널에서 남자들은 진짜로 일어났다. 더 이상 말뿐인 시위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지위 회복을 위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들의 행동반경은 이제 연애에서 가족으로 넓어졌다. 남성들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밀려 빼앗긴 수컷의 방을 수복하기 위해 작전 개시일 D-day를 설정,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집을 수컷의 공간으로 바꾸는 돌발 행동을 감행했다. 


데이트 비용 문제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자기 방을 갖고자 가족을 상대로 선전포고까지 하는 남성들의 공격성은 남녀 간의 불평등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앞서 살펴봤듯이 남성들이 누리는 특권적 지위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성들의 공격성은 가족 부양자로서의 가부장이라는 지위와 연관지을 때 분명해질 수 있다. 한때 남성들은 가족 내 유일한 임금 노동자로서 안정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그들의 노동 조건은 불안정해졌고,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 사이의 계급 격차는 날로 심화했다. 남녀갈등이 아니라 남남갈등이 사회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가난한 집 아내들은 더 이상 남편이 버는 돈으로 살림을 꾸려갈 수 없는 상황을 맞이했고, 가사노동과 저임금노동이라는 이중부담을 떠안아야 했다. 그렇게 남성들은 가부장제의 쾌락을 온전히 누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수방사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남성들은 부담스럽기만 한 남편과 아버지의 정체성을 버리고 스스로를 수컷에 동일시함으로써 아내와 아이를 공격하는 짐승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빼앗은 부자 남성들과 투쟁하는 대신, ‘와이프 졸도 프로젝트’라는 여성 혐오적 작전명을 수행함으로써  도착적 쾌락을 누리는 중이다. 


정재원 에디공 프로그래머, <복음과 상황> 15년 12월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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