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의명화]폴라X가 청소년관람불가인 이유 향유/Movie 2012.07.23 09:25

* 저희 에디공에서 진행했던 주말의명화 중 7월14일 날 보고 이야기 나눴던 <폴라엑스>에 관한 리뷰입니다. 참석하셨던 한 분이 꼼꼼하고 정리가 잘 된 리뷰를 작성해주셔서 "허락받고" 퍼왔습니다. 출처는 맨 아래에!




폴라X가 청소년관람불가인 이유



『소년 소녀를 만나다』,『나쁜 피』『퐁네프의 연인들』같은 영화들로 이름을 떨친 레오 까락스는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보다는 강렬한 이미지를 안겨주는 영화감독입니다. 재미있는 장면들이나 탄탄한 서사구조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까락스의 영화가 낯설 수밖에 없는데, 카락스가 빚어내는 낯섦을 통해 우리는 우리들의 ‘정상성’을 의심하게 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가 좀 이상하네”라는 거북함과 함께 “혹시 내가 이상한 게 아닐까?”라는 물음표가 돋아나죠.

 

우리 안에는 ‘광기’나 ‘야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들끓음이 있는데, 이 부글거림을 우리는 ‘이성’의 힘으로 지그시 누르면서 살아가죠. 그러다보니 모든 인간은 신경증 환자입니다. 자연에서 문명으로 건너온 우리들의 몸과 맘은 앓고 있습니다. 갈수록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현대인의 건강이 좋을 수 없는 이유죠. 자연에 대한 정복, 비합리성의 합리화, 야성의 문명화를 거치며 인류사는 나아갔고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자연으로부터 떨어져나간 현대인들은 불만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왠지 불안하고 뭔지 알 수 없지만 이게 아닌데, 라는 느낌에 휩싸이죠.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거리는 생각보다 좁으며, 이성 뒤엔 언제나 야성이 그늘져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안의 ‘광기’가 겁이 난 나머지 이성과 규율로 자신을 꽉 잡아매려 하나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 내 안의 열기는 때때로 튀어나와 우리를 자지러지게 만들죠. 남다른 성장과정을 거친 까락스는 바로 ‘비정상성’에 눈독을 들이며, 광기를 주제로 영화를 찍어왔습니다. <도쿄!>에서 드니 라방이 하수도에서 나와 도쿄 한복판을 걷는 롱테이크 장면은 그야말로 숨 막히는 ‘야성의 출현’이라 할 수 있죠.

 

2009 3회 넥스트플러스 영화축제 개막식에 참여한 레오 까락스 (2009-11-04)

 

이런 맥락에서 <폴라X>를 다시 보게 되네요. 예전에 처음 혼자 봤을 때만 해도 잘 이해가 되질 않았는데, 사람들과 ‘같이’ 다시 보면서 사람들의 의견을 듣다보니, 영화 안에 구조들이 보이고 새삼스레 생각할 지점들이 나타나더군요. <폴라X>에 청소년관람불가라는 빨간 딱지를 붙인 까닭은 섹스장면이 너무 야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부조리한지를 드러내는 ‘외설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아래 글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세상 어디에 ‘독창’이 있겠는지요. 어떤 ‘창조’라도 이미 ‘타자들의 흔적’이 있으며, 괜찮은 글들은 지워지지 않는 타자들의 흔적을 없애면서 마치 자신만의 생각인 척 하거나 타자들을 앞세우며 앵무새처럼 종알거리지 않습니다. 좋은 글은 ‘나와 너의 무늬’입니다. 그 무늬를 잊지 않고자 끼적입니다.

 

피에르는 엄청난 부잣집에서 태어난 도련님으로 사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글을 씁니다. 가진 자의 허영 때문이라기보다는 피에르 또한 자기 안의 비합리성 열기에 글을 쓸 수밖에 없었겠죠. 합리성으로 꼼꼼 따지면 예쁜 약혼자도 있겠다, 자기 어머니처럼 놀고먹으며 지내야 마땅하겠으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코 합리성으로 깔끔하게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알라딘’이라는 필명으로『빛 속에서』라는 소설을 씁니다. ‘알라딘의 램프’를 문지르면 ‘지니’가 나와 대단한 일들을 벌이고 해내듯 피에르는 자기 안의 지니를 꺼내 소설을 쓰고 뜨거운 호평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지니라는 ‘광기’가 늘 좋을 수만 없죠. 아직 피에르는 ‘빛’ 속에 있으나 빛이 있다면 어둠이 있는 법, 지니는 멈추지 않고 자신의 어둠을 불러내고 광기의 소용돌이는 피에르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립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삶에 이자벨이라는 기이한 여인이 맴돌고 있음을 알아채고 피에르는 이자벨과 만나고자 여러 시도를 하나 실패하다가 끝내 이자벨을 만나 ‘진실’을 알아버립니다. 영화 속에선 이자벨이 피에르의 ‘숨겨진 누이’라고 나오지만, 사실 누이든 엄마였든 이자벨에 대한 설명이 대수로운 건 아닙니다. 이자벨 그 자체의 상징이 대수롭죠. 그동안의 삶이 ‘허위’였음을 느끼며 거짓된 삶이 아닌 진실의 삶을 살고자 하는 ‘충동의 인격화’가 이자벨입니다.

 

이자벨은 마치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세이렌처럼 머리를 하고, 영화에선 야릇한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내 안에서 울리는 야성의 울부짖음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겠죠. 인간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명령에도 따르지만 신비롭게도 내 안에서 나오는 목소리에도 귀 기울일 수밖에 없지요. 이 목소리의 힘은 어마어마해서 거센 파도처럼 자신이 쌓아온 방파제들을 다 부수며 이 시대와 문명에 길들여진 삶은 가짜라면서 이른바 ‘예술가의 삶’을 살도록 몰아가기도 합니다.

 

자기의 목소리를 따라 피에르는 허위를 까발리는 진실의 글을 쓰겠다고 나서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자기 안의 자기보다 더 큰 무엇을 만났으니까요. 그 무엇은 자연이고 광기이고 야성이고 비정상성이죠. 그래서 그는 필명을 바꿉니다. 알라딘에서 ‘락’으로!

 

아직 피에르가 ‘빛’속에 있을 때 그의 앞에 이루 말 할 수 없이 기괴한 바위가 나타나는데, 피에르 안의 ‘바위’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의 삶은 암만 합리성으로 끌고 가려 해도 우리 안의 돌부리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우리는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좀처럼 언어화할 수도 상징화할 수도 없는 ‘록’ 앞에서 인간은 혼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피에르는 이 바위를 표현하고자, 삶의 진실을 말하고자 소설을 쓰지만 ‘표절’ 판정을 받습니다.

 

옷도 사는 곳도 피부색도 온통 하얀색으로만 범벅된 피에르가 이자벨을 만나 '진실'을 들은 뒤, 검은말을 타고 바위 밑으로 들어간다. 이제 피에르의 삶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표절의 의미는 여러 갈래로 해석이 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이미 피에르 같은 글이 수없이 있어왔다는 해석에 솔깃합니다. 다시 말해 문명화된 현대인의 삶은 거짓부렁이라면서 ‘자기만의 진실’로 써내려간 이들이 피에르 앞에 수없이 많았으며, 피에르는 ‘진실의 사도들’이 했던 외침과 거의 똑같은 소리를 반복했다는 얘기죠. 귀에 따갑도록 듣는 말이지만 결코 우리의 몸을 움직이지 않는 웅얼거림들!

 

다른 해석은 ‘록’조차도 앞서 나온 ‘알라딘’의 아류일 뿐이었다고 읽어낼 수 있죠. 피에르는 오붓하고 안락한 환경에서 벗어나 거칠고 불편한 곳에서 시력을 잃어가면서까지 열정으로 ‘진실의 언어’를 써내려갔으나 ‘허구의 언어’였던『빛 속에서』의 그림자일 따름이었다는 얘기입니다. 빛이 허위라면서 빛에서 나가 진실을 찾았으나 바깥 또한 빛과 마찬가지로 진실이 아니며, 허튼 소리라는 뜻이죠. 그렇담 과연 진실은 어디에? ^^;;

 

레오 까락스의 시선은 좀 차갑습니다. 이 체계가 싫다면서 밖을 상상하고 진짜 삶을 찾겠다고 하는 그 ‘진짜’는 무엇이냐는 물음을 던지니까요. 거짓과 싸워 진실을 되찾으려 하나 이미 진실은 거짓으로 얼룩져있거나 충분히 넘쳐나고 있기에 진실을 찾는 일은 별 쓸모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거짓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인간세상 자체가 부조리하고 허위임을 자꾸 맞닥뜨릴 뿐이니까요. 도망칠 수 있는 거짓의 바깥은 없습니다.

 

그저 지금 사회가 탐탁찮다고 볼멘소리만 해대거나 자기만의 ‘예술’을 한답시고 ‘자뻑’하는 이들에겐 <폴라X>가 따끔한 회초리가 될 수 있겠으나, 야성과 이성 사이에서 방황하며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이들에겐 어떤 희망도 주지 않은 채 꿀꿀하고 갑갑하게 영화는 마무리되죠. 피에르는 ‘절망의 도주선’을 밟게 되고 이자벨은 죽음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런 까락스의 생각을 좀 더 긍정해서 받아들일 수도 있죠. 어디 달아날 ‘외부’는 진작 없어졌으며 어디에도 ‘도피처’가 없다면, 이 안에서 새로움을 꾀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리 안의 램프를 꼭꼭 숨겨놓은 채 잘 ‘적응’한 신경증환자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지니는 사라지지 않기에 어차피 돌부리에 걸려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면, 야성이냐 이성이냐는 이분법이 아니라 이성화된 야성, 야성화된 이성이라는 새로움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요? ‘파국’을 멋있게 여기는 헛된 낭만이나 ‘권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속 쓰린 정당화라는 낡고 구린 허방들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성과 야성의 조화라, 말은 쉽게 했으나 정말 어려운 일이다. 영화에서도 광기에 취해 체제 밖으로 나간 피에르에게 루시가 돌아오면서 피에르는 이자벨과 루시, 다시 말해 야성과 이성을 둘 다 곁에 두는데, 야성은 이성을 견디지 못하고 이성은 야성 곁에서 시들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럼 어쩌나...


출처: 꺄르르님의 블로그 '당신 덕분에 꽃이 핍니다' http://blog.ohmynews.com/specialin/

  • 강주미 | 2012.07.23 13:01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야성과 이성의 적절한 조화는 우리내 인생 평생과업이 아닐런지요. 핏물속에 허우적대던 두사람의 몸부림이 슬프고 사무치게 그립습니당.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 PREV |  1  |  ···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  |  33  |  NEXT >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