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고 잘 사는 대한민국 - 연극 <연변엄마> 향유/Theater 2011.06.09 15:10


부유하고 행복한 한 중산층 가족이 있다. 전직 육군장성이었던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렸고, 아버지는 효심을 다해 할아버지를 모신다. 대학생인 그의 아들은 부유한 아버지가 주는 기득권의 안락함에 머무르지 않고, 진보를 자처하며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시위와 총학생회 선거에 나가며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신념을 지니고 산다. 한편, 약국을 운영하는 며느리는 남편과 치매 걸린 시아버지를 살뜰하게 맞추고, 전국 0.1%에 드는 고등학생 딸의 의대 진학과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겠다는 목표만 집중한다. 공부를 잘하는 이 집의 막내딸은 당장 천만 원짜리 프랑스 푸들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영 못마땅하지만, 모의고사 성적이 좋은 대가로 엄마가 곧 프랑스 푸들을 분양받아 주기로 했고, 대학에만 가면 아빠가 프랑스에 보내주기로 했다. 웃음이 꽃피는 단란한 가정인데, 그 웃음이 너무 지나쳐 기괴하다. 이 집에 연변에서 온 길순이 새로운 가정부로 들어온다.


이 행복한 중산층 가정은 길순의 시점에서 조명되며 그 허위가 한 겹씩 벗겨진다. 육군장성 출신 할아버지는 극도로 빨갱이를 증오했는데, 이는 공산당이었던 그가 동료의 정보를 넘겨주고 남한군에 충성을 맹세하여 홀로 살아남았던 죄책감의 발로였다. 한편, 효자 아들의 모습을 한 아버지의 실속은 할아버지가 전쟁 당시 빼돌린 국보급 보물을 상속하기 위해서임이 드러난다. 아버지는 경찰청에 납품하는 진압도구들을 생산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아들은 총학생회 선거에서 아버지의 직업이 공개되며 극도의 모욕을 겪는다. 젊은 시절 학생운동을 했던 훌륭한 ‘진보주의자’였던 아버지가 왜 이런 ‘보수꼴통’이 변했냐며 울부짖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강력한 어조로 설득한다. “네가 생각하는 진보와 보수는 피상일 뿐이며, 보수는 밥을 쥐고 있는 손이고, 진보는 제 손은 빈 채로 남의 밥을 뺏으려는 손이다.” 아들은 밥 없이 살 수 없는 자신을 확인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며느리가 치매 걸린 아버지에게 봉양하던 녹즙은 사실, 수면제를 탄 음료였고, 프랑스 푸들의 임신을 기다리던 막내딸은 프랑스인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자기가 먼저 임신을 한다.

 

고급아파트의 거실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의 바깥에서는 길순이 한국에 온 목적을 향한 고군분투가 펼쳐진다. 한국에서 연락이 끊긴 딸을 찾기 위해 전국을 다니고, 서울에서 다리를 다친 아들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월급은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다. 이 연극은 시작부터 매 장이 바뀔 때마다 길순의 복대지갑 안에 들어 있는 금액을 스크린에 투사하는데, 월 백만원을 받는 길순의 월급은, 단 한 번도 이백만원을 넘기지 못한다. 매번, 딸을 찾기 위해, 혹은 딸과 내연남이 진 빚을 갚기 위해, 심지어 주인집 막내딸의 중절 수술을 위해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도 백만원 언저리에서만 머문다. 그런데 길순의 돈을 착취하는 이들은, 길순을 인격적 삶으로 여기지 조차 않는 주인집과 같은 ‘안’의 사람들이 아니라, 길순과 같은 처지의 ‘밖’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단지 길순보다 조금 앞서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이들이다. 연출의 언급대로 ‘안’과 ‘밖’은 닮아간다. 길순도 어느새 전염되어 로또에 헛된 희망을 걸었다가 실패하여 자학을 하기도 한다. 결국, 일 년 내 수술해야 불구를 면할 수 있다던 아들의 수술비는 고사하고, 땅끝 마을 해남의 한 창녀촌에서 인생의 끝에 선 딸의 흔적을 겨우 붙잡지만, 맹인이 되어 섬으로 팔려갔다는 소식을 끝으로 딸을 찾겠다는 의지도 잃는다.

 



김은성 작가는 지금 고층아파트가 들어선 그곳의 가난하던 우리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그 역할을 맡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 작품을 썼다고 했다. 평소에 길순을 무시하던 막내딸은 자신을 도운 길순에게 왜 자기에게 잘해주느냐고 묻는다. 길순은 “원래 그렇게 하는 거니까”라고 대답한다. 가난한 그들에겐 재개발된 고층아파트에는 없는 당위가 있다. 그 당위는 ‘구린 한국’이 그저 싫던 막내딸에게 전해지며, 잠시 희망을 비추기도 한다. 하지만 부부가 사업과 주식이 잘 되어 더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려하고 ‘철없는’ 진보청년이었던 아들은 ‘성장’하여 외제차를 사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을 때, 프랑스 푸들대신 천만원을 길순의 아들 치료비로 건네주려던 막내딸이 치매 걸린 할아버지의 총에 맞는다. 실낱같던 공감의 연대는 우악스럽게 짓밟혔다. 이제 불법체류자로 격리된 길순은 처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여가 어딤까? 여가 한국임까?”


길순역의 강애심씨의 연변사투리 연기와 할아버지 역의 김재건씨의 치매노인 연기는 보기 드문 호연이다. 박상현 연출은 사실주의의 특성을 저해하지 않기 위해 스무여 명의 배역의 겹치기 출연을 배제했으며, 자칫 늘어질 수 있는 장면전환을 막간공연으로 채우며 극의 풍성함을 더했다. 비약을 자제하고 극적 증폭을 생략하여 담담하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을 그려낸 이 극은, 이야기 자체가 가지는 사실주의의 미덕을 잘 살려냈다. 손녀딸에게 총을 쏘고 나서 잠시 정신이 들어온 할아버지는 충격을 받아 자기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지만, 더 이상 총알이 없다. 손녀딸을 죽이고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않으려고 숨가쁘게 뛰어만 가고 있는 우리에게, 이 연극은 잠시 들어서는 ‘제정신’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글 @ 기독주간 (www.c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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