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톺아보기 7] 율법과 이웃 사랑 해석/View 2011.04.30 16:41

법은 구체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괄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이다. 따라서 법을 중시여기는 사람은 상대방의 입장이나 상황을 고려하기 보다는 그 사람의 행동이 법에 부합하는지 어긋나는지에 관심을 둔다. 결국 법의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보면, 우리는 오직 법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일 뿐, 주체적이고 창의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여 불행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 나고 법이 났지, 법 나고 사람 났냐”는 어느 드라마의 대사 속에서 “속이 다 시원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법은 태생적으로 가진 자의 것으로, 약자일수록 법의 폭력성에 더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기에 법에 대한 우리의 불신은 더욱 악화된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 말한다. 예수는 안식일에 일을 했는지 안했는지를 따지는 율법학자들에게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있는 것이라 일침을 놓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예수에 환호하며 율법 보다는 사랑을 말한다. (좋은) 기독교인은 상대방의 처지를 공감하고 최대한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늘 그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만 있지는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만약 상대의 입장에 공감도 안 가고 이해도 안 될 때, 사랑은 아름답기보다는 철근보다 무거운 부담이 된다. 이것은 이웃의 괴물성과의 마주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늘 친절하거나 상식적인 이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가족 중에, 혹은 직장 동료 중에 (상대적으로 나에게 더더욱) 괴물 같은 존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이웃이 나의 삶을 침입해 올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상식, 예의, 규범, 법 등의 룰을 요구하게 된다. 이것은 괴물 같은 이웃으로 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인 것이다.


이것은 연인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상대를 위해 많은 것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서로가 상대를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상호 암묵적인 전제 하에서 계속될 수 있을 뿐, 만약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사랑의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헌신은 비난의 화살이 되어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그리고 이 싸움을 봉합하는 손쉬운 방법은 용서보다는 ‘룰’을 세우는 것이다. 가령 하루에 몇 번은 연락을 꼭 한다들지, 어떤 기념일은 서로 꼭 챙기기로 약속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서 ‘룰’은 연인관계를 최소한으로 유지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연인관계가 파국으로 가지 않도록 제삼의 무언가를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큰 교회의 조직적이고 기계적인 방식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작은 교회의 무형식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의례, 형식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어떤 질서가 너무 강해도 너무 없어도 불편하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불가해한 이웃으로부터 침입을 받지 않으면서 너무 갑갑하지 않은 정도의 룰을 원하는 것이다. 이렇듯 룰이 없을 때의 난폭한 상황을 고려하게 된다면 쉽사리 룰의 폭력성을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고 난 다음에야 우리는 비로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보다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다. 여기서의 이웃은 내가 도움을 줄 대상에 그치지 않는다. 이웃은 나의 신변을 노리는 늑대이고 불가해한 괴물이다. 구약은 ‘율법’을 통해 이들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여지를 허락했다. 하지만 율법을 폐기하고 동시에 완성한 예수 이후, 기독교인에게 그 거리는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율법학자들의 질문을 이해할 수 있다.


by 변칙녀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