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대머리여가수> 집단리뷰 향유/Theater 2011.03.24 23:13

대머리 여가수 / 대학로 SM아트홀 / 참석 11명 / 3월 12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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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네스코는 소통을 문제를 많이 다루는 대표적인 부조리극 작가이다. <대머리여가수>에서는 가장 작은 공동체인 부부의 관계를 보여주며, 그 안에서 사람들이 소통이 얼마나 피상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에 대한 해석으로는 부조리한 소통이 낳는 관계단절에 대한 고발이라는 시각현실 그대로를 인정한 채 가볍지만 부정할 수 없는 또 다른 관계의 형태라는 긍정으로 나뉘었다.


- 중간에 식모가 ‘완착’(완전착각)이라고 애기하는데, 이 극에서 말하는 껍데기뿐인 소통을 함축하는 대사로 느껴졌다.


- 서로 다른 얘기하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데 마치 겉으로는 의사소통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말을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배우들은 서로의 말을 잘 이해하고 대화하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길게 보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 단면으로 짤라보면 또 말이 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 책을 읽는 세대와 영상문화만 접한 세대는 서로 이해를 할 수 없다. 매체를 접하는 게 다른 세대 사이에서는 의미의 개념조차도 다르게 만든다. 그래서 이 연극을 보고 진지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어떻게 보면 보수적일 수도 있다. 이 연극이 불일치의 연속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 우리가 살아가는 건 이 연극에 나오는 것처럼 불일치 속에 가끔씩 존재하는 일치 때문이 아닐까. 소통이 되는 소수의 사람들하고만 관계 맺으며 살 수는 없쟎은가.


- 신을 믿는 사람으로서 부조리한 인생을 조리 있게 살려고 하는데, 반연극에서는 신이 없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한 점이 무섭기도 하다. 베케트의 연극에서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이오네스코의 연극에서는 소통이 안 되는 것을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이러한 삶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내 안에 있는 것들을 타인이 이해했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우리는 소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소통이 왜 있어야만 하느냐는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단지 외롭기 때문에 소통을 하는 것인가 생각을 해야 한다.


- 연극에서나 페이스북 같은 실생활에서나 내가 관심 있는 것에 잠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은 진짜 소통이 아니다. 순간적인 관심들은 소통의 가면과도 같다.


- 현대인의 특성상 그런 고독함을 느끼는 것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그런 부조리함에서 느껴지는 유희를 적극적으로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감각도 있다. 벤야민은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어떻게 예술 자체가 혁명적으로 변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처럼 부조리한 대화들이 사람의 진심을 어떻게 바꾸는지 생각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 어떤 의미일지 생각하기 보다는 무의미에 어떤 논리가 있을까 생각을 더 해 봐야 할 것 같다. 소통과 고독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사람은 원래 외롭기 때문에 결핍을 견디고 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물론 동일한 생각을 같이 품고 가는 것은 행복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반드시 불행일까? 생각이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너무 불행하게 느끼지 말고 인생을 계속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


- 소통이라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폭력성과 아이러니를 전제하고 있는 것 같다. 종교라는 것도 신념 체계이기 때문에 비슷한 문제가 있다. 고통이 생기기도 하고, 위안을 기다리게 만들기도 한다. 또 현실의 부조리를 자기만의 논리로 조리있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 김훈이 고통은 개별적이라는 말을 했다. 우리는 그 고통을 똑같이 느낄 수는 없다. 고통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 중간 지점을 모색해야 한다.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부조리가 필요악처럼 발생한다. 차라리 소통이 안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소통의 부재나 외로움은 함께 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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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은 반연극이다. 핸드폰을 켜 놓거나 사진 찍는 것도 허락했고, 심지어 배우들은 연극 중간중간 관객석의 카메라에 포즈를 취해주기까지 했다. 이러한 반연극적 요소들이 주는 효과와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 이오네스코의 반연극은 극에 몰입하는 연극과는 다른 개념을 재정립한 것이다. 연극은 동일시를 추구하는 게 아니다. 연극은 연극일 뿐이다. 베케트처럼 이오네스코의 원작도 그러한 반연극을 추구한다. 원작은 오늘 본 연극처럼 코믹하지 않고 진지하게 부조리함을 말하는 이야기다.


- 마지막의 공을 던지는 퍼포먼스는 스노우쇼에서 온 것이다. 안석환이 계속 같은 움직임을 하는 것도 반복 기법을 통해 각인시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며 부조리하게 삶을 사는 것을 느낄수록 외롭다. 우리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부조리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줘서 이런 연극이 좋다. 이 연극은 가볍게 웃을 수 있지만 끝나고 나면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한 느낌을 준다. 그런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원작과 달리 공을 던지는 퍼포먼스를 넣은 것 같다.


- 소통의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대화들이 씁쓸하지만 우리 인생 자체가 원래 그렇다. 그래서 공을 던지는 퍼포먼스는 대중적인 방향의 연출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긍정하기 위한 재해석인 것일 수도 있다.


- 연극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들 때문에 실제와 허구의 경계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이상한 느낌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 이러한 장치가 소격효과를 일으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히려 이 극에서의 반연극적 장치들은 극의 흐름에서 소격효과를 일으켰을지 몰라도, 관객을 무대로 흡수하는 효과가 있었다.


- 이건 소격효과로 보긴 어려운 것 같다. 오히려 상호작용을 이끄는 장치라고나 할까?


-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처럼 반연극적인 구조의 연극이 많다. 원래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연극과 관객이 참여할 수 없는 연극으로 나누어지는데, 원래 우리나라에서 연극의 시초는 농민들을 계몽하기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후자로 시작되었다. 이제는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는 연극을 많이 볼 수 있는 것 같다.


- 어떤 부분들은 보르헤스의 소설처럼 시간과 공간이 섞이는 느낌이었다. 연극이라는 개념도 사람들이 설정해 놓은 것인데, 이 연극에는 그런 개념을 종종 바꾸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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