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톺아보기 4] 나니아 연대기와 기독교적인 것 해석/View 2011.03.17 18:40


“한국교회의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 같다. 성경의 직설적 이야기로만 복음을 전하는 것에 익숙한 한국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복음을 그대로 전할 때 거부감 내지 적대감을 보이는 현실 속에 계속 성경을 통한 복음 제시만을 고집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가는 고민해 볼 문제다. 필자는 루이스의 소개를 계기로 해서 상상의 세계를 제시함으로써 복음의 세계를 주목하게 만들고 그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를 보여주는 것은 이 시대적 사명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본다.” - 박양식, 「옷장 너머의 세계, 나니아-나니아 연대기와 문화선교적 모색」중



박양식은 한국교회의 문화적 보수성에 대해 비판하며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루이스가 차용했던) 산타클로스나 반인반수 캐릭터 같은 소재를 사용하는 것에 두려워말고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하여 그것의 작동하는 체계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기존에 작품의 맥락보다는 특정한 소재에 대해 과도한 반감을 가졌던 기독교인들의 태도에 대한 적절한 비판일 수 있다. 맥락을 떠나 특정 소재에 대해 (호불호의 문제가 아닌) 규범적 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은 지양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는 분명 문화에 대해 부정적 태도로 일관했던 기존의 보수적 기독교에 비해 진일보한 태도다. 기존의 문화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타자의 존재를 억압하거나 배제한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가령 영화 <거짓말>에 대해 음란물의 딱지를 붙이고 상영금지를 시도했던 운동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사건으로 보수적 기독교의 폭력성은 대중에게 널리 각인됐다. 이에 대한 반성의 일환으로,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태도의 변화는 분명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근본적인 것을 은폐하는 위험한 방식의 진일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은 여전하다. 박양식은 그리스도인의 상상력 확장을 촉구하며,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직설적) 복음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일반인들에게 상상의 세계를 경유하는 방식이 더 지혜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복음 그 자체’ 즉, 복음의 내용이다.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반인이 복음에 대해 적대감을 보이는 것은, 성경의 직설적 이야기로만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가 믿는 ‘복음 그 자체’에 있다. 

이것은 어떤 작품에 대해 ‘반기독교적’, 혹은 ‘비기독교적’이라고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독교적’이라고 말하는 방식에 제동을 건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독교적’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의 근거는 복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인이 믿는 복음은 특정한 신학에 의해 각색된 복음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이것은 이미 하나의 입장에 불과한 ‘개혁주의 세계관’을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제기됐던 문제이기도 하다. 복음은 늘 문화적이다. 그것은 언어 없이 혹은 매개자 없이 전달 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전달하고 있는 ‘복음’ 혹은 내가 주장하는 ‘기독교적인 것’은 정말 그러한가? 

불가지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기독교적인 것’이 있다고 (정확히 말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어떤 명제로 알 수 있거나, 혹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적 경험을 비추어 봤을 때, 하나님의 뜻은 늘 타자를 통해서 주어진다. 그것이 교회일 수도 있고, 자연일 수도 있고, 내가 만나는 누군가일 수도 있고 어떤 작품일 수도 있다. 우리는 (두 셋이 모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다. 

우리가 어떤 작품을 ‘기독교적’이라고 말했을 때는, 우리가 발견한 하나님의 뜻을 명제화 혹은 개념화하여 사용하는 방식일 것이다. 가령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선하심’ 혹은 ‘정의로움’과 일치하는 것, 아니면 성경에서 묘사되는 ‘패역한 죄성’이 잘 묘사된 것들에 대해 우리는 ‘기독교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주객이 전도됐다. 우리가 작품을 대하는 태도 혹은 타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은 그들이 기독교적이라고 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기독교적인 것을 고민하는데 있다. 그들은 그들이지 기독교적이거나 비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타자를 배척하는 부정적 태도에서 타자와 소통하는 적극적 태도로의 변화는 기독교적인 것의 모호함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by 변칙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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